artranslation  
Front Page
Tag | Location | Media | Guestbook | Admin   
 
'한국사진의 역사'에 해당하는 글(3)
2007.05.06   사진엽서로 풀어보는 조선 이야기
2007.04.17   김한용이 바라본 1950-1960년대(펌글)
2007.04.16   1954 Korea - 대구(펌글)


사진엽서로 풀어보는 조선 이야기
사진관련 미학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나는  최근 한국 사진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중점적으로 논쟁을 하고 싶은 주제는 사진을 보는 시선, 곧 '응시'(gaze)가 한 문화의 역사와 사회를 반영하는데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그리고 사진이란 도구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넓게는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데 어떻게 관여해 왔는가를 짚어보는 것이다. '문화'라는 무형적인 의미는 현대사회에 '이미지'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형상에 의존하여 유형적으로 존재한다.

조선이라는 옛 우리 민족의 삶을 우리는 글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상상을 통해 접해왔다. 이런 문화이야기가 국가적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돋구는데 일조하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뿌리 찾기'는 우리가 어떤 한민족인지를 무형적으로 그 틀을 세워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 조상이 실제로 어떤 삶을 (예를 들면 옷,음식, 생김새 등) 살았는지, 그 유형적 모습을 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런 면에서, 사진이란 도구는 우리의 조상이 실제 '그당시'에 존재했고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를 단편적으로 편파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사진의 파편성이다. 다시 말해 사진은 역사의 부분 부분만을 보여준다. 언제나 역사를 해석하며 발생하는 오류는 이같은 과거의  파편적인 사진들이 마치 그 시대의 모든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진의 속임수에 있다. 바로 사진의 기록성, 그 거짓없어 보이는 현재의 재현은 곧 그 당시를 있는 그대로 증명해주는 듯 하다. 그러나 이점이 바로 사진의 어두운 면, 사진의 거짓스런 가면이다.

우리가 싸이월드에 행복한 순간의 사진만을, 내 모습이 예뻐보이는 사진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진만을 선택하고 편집해 올리는 것처럼, 과거의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사진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가 보여주고 싶은 사물의 대상에 따라 이미지는 편집 될 수 있다. 이런 사진의 용도가 식민주의 시대와 같은 국가와 국가간의 민족주의에 얽매일 때, 사진이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처럼 그렇게 예술적이지도 노스텔지어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과거 일제 점령기적 내 조상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미개해 보이는 것에 수치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500년 찬란한 역사의 조선이란 이미지는 어쩌면 단 몇 장의 사진으로 그 의미가 퇴색될 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진은 누가 어떤 대상을 이미지화했느냐에 따라 매우 독단적인 도구로 변모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진엽서로 풀어보는 조선 이야기'는 사진이 갖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내는데 매우 적절한 책인 듯 싶다. 그리고 이 책의 리뷰를 쓴 기자분과 저자가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당시 조선 풍속 엽서가 생산했던 이미지들이 여전히 한국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부분은 여러모로 시각예술을 다루는 우리 작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는 '그들의 시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한민족의 문화를 이미지화 할 때인 듯 싶다.

글. mojikim  

사진엽서로 풀어보는 조선 이야기
[베스트셀러] 권혁희의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2006-08-14 08:47:57

이 책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이 사진은 관아의 뜰에 끌려 나온 죄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들이 어떻게 감옥에서 나와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진이 어떤 경로로 사진엽서가 되어 상품으로 팔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누군가가 이들을 밖으로 끌어내 강제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이것이 수천 장의 엽서로 제작되어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러한 사진이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러한 결론 뒤에는 사진엽서가 그것이 생산된 당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생생히 반영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책은 사진엽서가 하나의 ‘문화적 유물(cultural artifacts)’라는 전제 아래 그 유물에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추적하고 있다. 엽서가 유물이라면 우리가 이 책에 실린 엽서들을 볼 때 그 사진 자체의 내용만을 보아서는 이 ‘유물’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이때 저자의 이러한 시도가 더욱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그러한 ‘재현(re-presentation)’의 구조가 제국주의 시대에 생산된 사진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식민지를 바라보던 제국의 시선은 우리 자신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하고 있는 이미지들에도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제국의 미장센, 문화 제국주의의 축소판 사진엽서
위 엽서의 아래에 쓰여 있는 제목을 보자. 영어와 일본어인 것으로 보아 이 엽서의 제작자, 소비자는 서구인과 일본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함포를 앞세우고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그러나 효율적인 무기는 총과 포만이 아니었다.

제국주의는 이들 국가의 지배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던, 시대가 공유한 이데올로기였다. 제국주의가 이렇게 문화로서 정착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인쇄 자본주의의 공헌이 컸다.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신문, 잡지, 서적 등 다양한 인쇄물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이러한 인쇄물들에는 식민지의 풍경과 풍속이 묘사되었고,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은 근대 문물의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에게 식민지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을 불어넣었고, 동시에 근대 문명의 성취자로서의 자긍심과 우월감을 고취시켰다. 인쇄술의 발달이 국민과 국가, 제국과 식민지를 재현하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에 더해 사진이 발명되면서 문자보다 강력한 파급력을 지닌 시각 이미지들이 각종 인쇄물이 실려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사진은 근대 문명의 산물인 동시에 전파자이기도 했다. 근대적 재현 체계로서 사진은 과학이라는 시대정신과 합류해 계몽의 현신이 되었다. 카메라가 담은 풍경 중 제국 국민들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 것은 단연 식민지인들의 인종을 부각시킨 이미지들이었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서구 중심적 시선이 만들어낸 욕망의 구조에 따라 반복적으로 상품화되었다.

결국 카메라는 제국주의가 그 (문화적) 영토를 확장하는 데 총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진정 공포스러운 것’은 총이 아니라, ‘인종주의, 차별, 모멸감과 같은 비가시적인 폭력의 구조를 만들어’내 식민지의 모든 것을(심지어 학살 장면까지도) ‘저들만의 고상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폭력’, 즉 ‘카메라’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총으로 상징되는 군사력만큼이나 강력하게 제국주의의 정신을 지탱하는 과학적 도구였다. 카메라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에 형성되는 시선의 권력을 증명하는 서구 문명의 총아라 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 사진을 촬영하는 자는 총을 가진 자였으며 동시에 지배자이자 통치자였다.…

총이 서구 근대 문명을 표상하는 물리적인 폭력 기계였다면, 사진엽서와 같은 시각 이미지는 상품과 오락의 형태로 대중에 은밀히 스며들어 지배자적 시선을 내재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무엇보다 엽서의 형태로 만들어지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대중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값이 저렴하고 사용하기 간편한 엽서 자체의 효율성에 힘입어, ‘서구인들이 발견한’ 식민지인들의 이미지들이 사진엽서로 만들어져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 엽서들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위한 수단으로가 아니라 수집용으로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었으며, 심지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교환, 판매되는 문화까지 형성되었다. 제국주의가 서구의 시대정신으로서 절정에 다다른 19세기 말에 탄생한 시진엽서는 한 해에만 수십억 장이 발매되어 서구 문명의 장밋빛 미래를 재현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고 전파한 비서구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강화했다.

즉 사진엽서는 문화 제국주의의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선의 권력은 서구인들이 생산한 아프리카 등지의 사진엽서뿐 아니라, 대만, 조선, 남양(南洋) 군도 등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사진엽서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조선인의 이미지들이다.

인류학적 시선과 대중적 시선
19세기 제국주의가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인류학을 꼽을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사전 조사를 도맡아 했고, 이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한 브레인이었다.

인류학자들은 타 인종의 신체와 풍속을 관찰하고 비교했으며, 그 자료를 토대로 그들의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와 비교했다. 초기 이들의 연구는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진화론과 우생학에 근거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이때 사진은 훌륭한 기록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마치 물건의 치수를 재듯 식민지인들의 두상이나 그 밖의 신체 치수를 측정하고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인체 측정을 통해 밝혀진 인종 간의 차이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할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그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타 문화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대중에게까지 스며들었다. 그들이 연구용으로 촬영한 사진들이 사진엽서와 같은 인쇄물들에 찍혀 팔려나갔고, 또한 역으로 이미 생산된 사진엽서가 인류학적 연구의 자료가 되기도 했으니, 당시의 인류학적 관점은 대중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11~1918년 조선 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조선인들을 촬영했던 도리이 류조가 있고, 또 1919년부터 20년간 조선의 민속을 연구했던 무라야마 지준이 있다. 류조는 전국 120개 지역에서 총 2,980면에 이르는 성인 남녀와 아이들의 정면, 측면, 뒷면, 반신을 촬영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인간을 사물화, 객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인물이 지닌 골상학적, 관상학적, 인종학적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무라야마의 경우에는 조선 총독부가 발행한 관광 팸플릿과 사진엽서의 이미지들을 조선의 민속 연구에 활용했다.

일본인의 카메라에 갇힌 조선
조선 관련 사진엽서들은 190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었고, 또 그만큼 선풍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후반 사진엽서 시장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조선 관련 이미지도 사진엽서로 생산된 것이다. 이러한 엽서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조선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연출하고 조작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왼쪽 사진은 1900년 무렵 일본인이 발행한 사진엽서로, 조선인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의 후면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 사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러한 사진이 어떻게 해서 찍히게 되었을까? 뒷모습만 재현된 이 아이들의 이미지는 두발과 복장 등 조선인의 특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재현되었을 것이다. 여자 아이의 뒷모습에서는 땋은 머리와 댕기가, 남자아이의 이미지에서는 길게 늘어진 복건이 눈에 띈다.

그 밖에 조선인 여성들이 외출할 때 썼던 쓰개치마의 사진이 많은 것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형태의 이미지들이 ‘조선 풍속’이라는 제목을 달고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 기념품으로 대량 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진을 이용한 엽서들은 서구인(또는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풍속을 알려주는 인류학적 정보로서 기능했다. 사진으로 재현된이미지들이 사실의 증거로서 기능한 것이다.

여기서 각 엽서의 제목들은 ‘조선 풍속’이라는 이름 하에 생산자(일본인)들만의 자의적인 분류법에 따라 분류되면서 일련번호를 달게 되었다. 사진이 가진 기계적 기록성이 제목을 얻게 되면서 객관적 정보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진 속에 실린 인물들은 개인성을 완전히 잃고 한 인종 또는 한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다시 만들어졌다. 더욱이 이와 유사한 이미지들이 여행 산업의 부흥과 함께 관광 팸플릿이나 조선 안내 책자들에도 반복되어 실리면서 조선인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일본은 인물이나 풍속 사진 외에도 다양한 이미지들의 사진엽서를 만들어냄으로써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계몽의 사명을 자임했다. 이는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고 동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예들은 조선 통독부가 발행했던 시정(始政) 기념엽서나 박람회 사진엽서, 근대 도시로 변모한 경성의 사진엽서들에서 볼 수 있다.

시정 기념엽서는 주로 식민 지배 이전의 낙후한 조선과 지배 이후의 근대화된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들을 나란히 배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박람회 사진엽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박람회 엽서에서는 전시장에 조선인들을 세워놓고 실제로 생활하는 모습을 관람자들에게 보여주던 장면까지 볼 수 있다.

경성 사진엽서 역시 자동차와 전차가 놓인 시가지의 모습을 통해 근대화의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특이한 것은 그러한 사진들 옆에 망국의 한을 읊는 시가들이 실렸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생산한 사진엽서들은 단지 기록적인 다큐멘트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시선의 권력과 ‘재현의 정치’가 구현된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시선의 권력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위의 엽서와 같이 조선인들을 모델로 세우고 세트에서 촬영한 사진의 엽서들은 이 엽서들이 촬영자와 생산자의 의도에 따라 ‘연출’된 사진들임을 증명한다. 거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어느 정도 우연에 의해 피사체의 구도가 결정되었다면,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은 다름 아닌 소비하는 주체의 욕망에 의해 선택된 구도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지게를 진 남자, 물동이를 인 여자, 아름답지만 가련한 기생
사진엽서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근대의 시선으로 본 전근대의 모습이자 지배자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적 이미지였다. 조선의 어는 곳을 가든, 카메라를 든 촬영자의 시선 안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넘쳐났으며, 이는 모두 다 촬영자와 제국의 국민들이 욕망하는 이미지들이었다. 그것은 쓰개치마를 쓴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은자의 나라’이기도 했고, 지게를 든 남자의 모습으로 재현된 ‘낙후된 비문명 국가’이기도 했다.

한 프랑스인 여행자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조선에 ‘얼마나 풍부한 민속학적 자산’이 널려 있는지를 두고 감탄했다. 그에게는 조선의 모든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관찰 대상이었으며, 그가 관찰한 대상들은 카메라에 담겨 여행기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스인들에게 조선을 소개하는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정보는 조선의 실체가 아닌 왜곡되고 신비화된 형태의 것이었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는 그 어떤 이미지보다도 더 스테레오 타입화되어 대량으로 생산됐던 사진, 즉 지게를 진 남자와 물동이를 인 여자, 그리고 기생의 이미지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지게를 진 남성의 이미지는 다른 두 이미지와 함께 조선의 풍속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표상된다. 지게에 관한 묘사는 사진엽서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여행기나 관광 팸플릿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이다.

거리를 지나던 사진가는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얹고 있는 조선인을 멈추게 하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의 열악한 사회 경제적 상황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물동이를 인 여성의 모습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의 경우가 남성의 이미지와 다른 것은, 물동이를 머리에 얹고 있거나 빨래 등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에서 젖가슴이 드러난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여성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던 욕망의 소산이다.

이렇게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특히 기생을 찍은 사진엽서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나아가 청순하고 가련한 기생의 수동적이고 애처로운 이미지는 일본에 보호받아야 하는 식민지 조선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엽서에 재현된 시선의 권력, 여전히 살아 있는
사진엽서는 사진의 복제를 통해 탄생한 소비 상품이자 당대가 ‘보고자’ 욕망했던 바가 개입된 문화적 산물이다. 이 책은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와 일본이 생산한 사진엽서를 통해, 당시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고자’욕망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수백 장의 자료와 함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당시 조선 풍속 엽서가 생산했던 이미지들이 여전히 한국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지 과거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으로 머물지 않고 현대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준 넷포터]
이준 넷포터의 다른 기사 보기
Tag : 조선, 한국사진의 역사

name    password    homepage
 hidden


김한용이 바라본 1950-1960년대(펌글)

청계천, 종로 일대, 1966
퍼온 글입니다.

김한용이 바라본 1950-1960년대

박평종 │ 사진평론가

한국 광고사진의 개척자이자 해방 이후 한국 사단의 산증인인 김한용의 또 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 한데 묶여 공개된다. 1950-60년대의 모습을 기록의 관점에서 촬영한 사진이 그것이다. 일부 공개된 사진들도 더러 있지만 그의 흑백사진 작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사진세계의 중요한 한 축을 새롭게 만나는 듯하다. 사실 이 사진들은 김한용의 사진세계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기록사진이 현시점에서 지니는 중량감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사진가 스스로에게 이 사진들은 요람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가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47년 국제보도연맹에 사진기자로 입사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59년 퇴사할 때까지 13년 동안 줄곧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해방 후의 과도기와 6·25전쟁, 전후 급속히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왔던 까닭에 이 사진들은 그야말로 그의 사진관(寫眞觀)을 형성시켰던 토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광고사진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면서도 최근까지 계속해서 명동과 인사동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며 초기의 사진작업을 이어 왔다. 1950-60년대의 모습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국제보도연맹 시절에 형성된 그의 작업 역량이 견실하게 축적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들은 동시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과 몇 가지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생활주의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임응식이나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신선회의 사진가들은 시대의 궁핍한 생활상과 혼탁한 사회상의 반영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둡고 암울한 사진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리얼리즘 사진으로 선회하기 이전 오랫동안 공모전 형식의 예술사진을 통해 사진 형식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대상을 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그 결과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에는 암울함과 극적인 모습이 혼합된 형태로 남아 있다. 사진의 형식미를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때로는 암울한 모습을 정갈한 구도와 균형잡힌 공간 구성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상황을 미화시키는 경우도 종종 엿보인다.
한편 김한용은 국제보도연맹에서 활동하기 이전까지는 화가 수업을 받았을 뿐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하지 않았다. 국제보도연맹에서 활동했던 사진가들의 대부분은 일제시대에 유행했던 공모전 사진 형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제보도연맹은 1945년 11월에 창간호를 발행했다. 본격적인 사진 화보지였던 이 잡지의 초창기에 사진을 제공했던 김정래, 현일영, 임석제나 이후 간헐적으로 사진을 제공했던 임응식, 최계복, 이해선, 정인성, 이건중 등은 모두 공모전에서 입상 경력이 많았던 사진가였다. 물론 김한용도 1948년 국제보도연맹이 주최한 향토문화사진 공모전에서 입선한 이후, 1954년에는 아사히신문사 주최의 국제사진살롱에서도 입선한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이전까지는 공모전 형식의 사진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사진에는 집요한 형식미가 야기하기 쉬운 작위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또한 『국제보도』는 발행 목적을‘조선 문화운동에 가장 친한 동지가 되어 씩씩하게 뻗어 나가는 새 조선의 진정한 모습을 국외에 자랑도 하고 외국의 소식을 국내에 알려주어 신문화 건설을 촉진시키는 데 있다(『국제보도』 창간호, 1945년 11월호)’고 밝히고 있어, 국내의 빈궁하고 암울한 모습보다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보도연맹의 이러한 성격은 김한용이 사진 활동을 펼쳐나가는 데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사진들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전쟁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이며 활기에 넘친다.



2
그가 기록한 서울 시가는 전쟁의 참화를 말끔히 털어 버린 모습이다. 군데군데 전쟁의 흉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도심 내부는 빠르게 정돈되어 이것이 진정 수년 전만 하더라도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그 도시인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도시의 뼈대가 모조리 불타고 무너졌지만 천성이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민들레처럼 강인한 한국인들은 어느새 미래의 메트로폴리탄을 건설할 반석을 다지고 있었다.
불과 50년 전에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사람들에게 서울은 사람이 살기에 부적절한 도시처럼 보였다. 다름을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았던 현자들을 제외하면 단순한 호기심에서 접근했던 이들에게 서울에는 왕궁만 있었다. 개항 시기에 서양사람들이 촬영한 서울 시가는 왕궁의 우아함에 대비되는 더럽고 초라한 모습이거나 개발이 필요한 전근대적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편 서양문물의 번식력을 일찍 배웠지만 한국 전통문화의 깊이를 동경했던 일본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조선을 연구했다. 하지만 대개는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한국의 열등함을 보여주는 도구로써 사진을 이용했다. 서울이 서양식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변모해 왔다고는 하지만 이 변모는 일본에 의해 주도된 것이어서 서양식이라 할 수도, 그렇다고 일본식이라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변화였다. 이 변화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양을 닮으려 했던 19세기의 일본과는 다른 경로를 밟아 온데다가 그나마 자주적이지도 못했다. 전통을 보존하면서 서양을 배운 일본과 달리 우리는 강제적으로 전통과 단절되면서 서양을 닮아갈 수밖에 없었다. 파손과 약탈의 역사로 점철된 왕궁과 각종 문화유적은 원형조차 찾아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된 경우가 태반이다. 해방 이후 전통을 복원할 기력조차 회복하기 전에 국토를 덮쳐 버린 전쟁은 이 단절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6·25전쟁은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인명과 재화의 피해라는 측면에서도 재난이었지만 한국 역사의 특수성과 맞물려 일제시대가 강요한 전통과의 단절을 가장 극한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이었다.
전통의 흔적을 찾아보려면 눈을 씻고 샅샅이 훑어보고 또 훑어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할 만큼 원래의 서울을 보기란 어렵지만 이 도시는 갑작스런 단절에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하기야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사실 그 단절의 폐해는 빨리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단절은 단지 당황스럽고 적응이 쉽지 않을 따름이지만 생존이 우선인 상황에서 전통이란 여유에 속한다. 그래서 잿더미 속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새로운 도시는 경이와도 같다. 일본식 가옥과 서양식 건물이 여기저기 섞여 있고, 도심의 하늘에 복잡하게 걸려 있는 전선 밑으로 지게꾼이 지나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국제극장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은 때이른 풍요의 상징이고, 폭격 맞아 폐허가 됐던 명동에 들어선 양복점과 서양식 간판들은 빠르게 진행되는 개발의 징표이다. 기껏해야 2층 목조건물로 들어차 있던 일본식 거리에 비하면 3층, 4층으로 올라가는 양식 건물은 익숙하지는 않아도 부에 가깝다.
한 시대의 풍경에는 전형적이라 할 만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1950-60년대는 어쩌면 한 세기 이상에 걸쳐서야 나타날 수 있는 변화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던 까닭에 전형적인 모습을 쉽게 단정하기란 어렵다. 굳이 규정하자면 빠른 변화라고나 해야 할텐데, 변화란 상태가 아니라 흐름이어서 전후 관계를 같이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급속한 변화 속에는 항상 사라질 것과 새롭게 나타날 것이 같이 섞여 있다. 그 시대가 그랬음을 우리는 김한용의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빠른 변화 때문에 급속하게 재건되는 서울에는 옛것과 새것이 기묘하게 혼재된 모습이다. 서울의 관문에는 한자와 영자로 된 현수막이 함께 걸려 있고, 복잡한 전선으로 얽힌 전신주 아래로는 손수레가 지나간다. 빠르게 복구된 서울역 앞에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전찻길이 있고 바로 옆으로는 국적 불명의 수입 승용차와 자전거, 달구지가 교차하며 지난다. 우리식 홍예문이 아니라 서양식 아치형으로 건축된 독립문 위로는 전차 통행을 위한 전선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다.
전쟁의 상처를 복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제가 훼손시킨 전통을 복원해낸다는 생각보다는 빠르게 서양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어느새 서양문화는 멋지고 세련된 것으로 각인되어 도시의 중심가는 이 새로운 문화가 이식되는 장소로 변해 간다. 서양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유명 백화점이 현수막을 내걸어 광고하는 고급물품은 항상 미제이다. 서양에 이끌렸던 이들에게 서양문화는 모던한 것, 요컨대 멋지고 세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모던이 매혹적인 까닭은 거기에 무슨 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새것이었기 때문이다. 새것이라고 다 매혹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주어진 것이 불만스러울 때 새것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진이 보여주듯 그 시대 서울의 모던함을 구성하는 것은 도리스 데이 주연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충무로, 샤넬미용실과 파리양장점이 있는 명동, 외제 승용차가 굴러다니는 종로 등이다. 사실 이 사진들은 색만 바랬을 뿐 현재의 서울 모습과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건물이 더 웅장해지기는 했지만 이 도시에는 여전히 그 시대 사람들이 모던함에 대해 가졌던 열망이 변형된 형태로 연장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현재의 서울 모습에 대해 반추해 보도록 하는 각성제 역할도 같이하고 있다.



서울 대흥동, 1958


3
전쟁 이후의 1950-60년대를 기록한 대개의 사진가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그 시대의 전형처럼 다루는 것이 상례였다.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도 아니고, 더구나 과거 서양인이나 일본인들이 조선의 모습을 기록할 때 그러했듯 조선인의 모습을 비하시켜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공모전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형식미만을 추구해 왔던 사진가들에게 전쟁이 던져 준 충격은 상상 외로 컸다. 일제시대부터 활동해 오던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종군사진반에 소속되어 전쟁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은 현실과 유리된 채 프레임 속의 세계에만 안주하고 있었던 오랜 사진적 관행에 대한 자기비판의 성격도 있었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쟁의 참상이 사진가들의 숨은 본능을 일깨운 측면도 있다. 국제보도연맹의 사진기자로 서북전선을 넘나들었던 김한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는 국제보도연맹이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처럼 비참한 한국의 모습보다는 참화를 이겨내고 극복해 나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편 도시 곳곳을 뒤적여 가며 기록한 그의 사진 속에는 지금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 시대 생활상의 면면이 농축되어 있다. 전쟁으로 인구 변화와 이동이 급격했던 탓에 인구조사와 신원확인은 도시 정비를 위해 시급히 요구되는 과제였을 것이다. 증명사진관과 도장가게가 늘어선 부산 거리, 일자리를 찾아 한 보따리씩 짐을 이고지고 상경하는 사람들, 아직 채 충분한 주거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거리에 세간을 늘어놓고 빨래를 말리는 사람들은 전후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 다리 위로는 달구지와 자전거가 지나다니고, 만화경은 어른들에게도 흥밋거리이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군중이 모이면 백의가 태반이어서 거리는 온통 흰 점들이 오물거리고, 플라스틱 바가지가 보급되기 이전인지라 한겨울에도 여인네는 진짜 바가지를 양 어깨에 주렁주렁 매달고 팔러 다닌다.
파괴된 건물을 새로 짓는 노동자나 하역인부들의 모습이 보여주듯 재건에 필요한 것은 노동이다. 거대한 세간을 지게에 져서 나르는 사람들, 손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는 사람들, 고되 보이지만 희망을 주는 노동이다. 시장은 사람들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운좋게 폭격을 피해 살아남은 지역에 상권이 형성되어 가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소규모 경제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이다. 꿀꿀이죽이라도 먹어 가며 겨우 연명해 온 사람들이 조금씩 일어서 꼼지락거린 것이 폐허였던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길가 김장시장에 산처럼 쌓인 배추더미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온다. 시장에 모인 산물은 풍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모두의 삶에 활력을 준다. 아직은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아 옛날 옷가지들을 대충 주워 입어 추위만 막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마음만은 즐겁다.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시린 발을 녹이면서 담소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무리 희망에 의지하여 일하더라도 당장의 역경은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모두가 정상치 이상을 일해야 하지만 항상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막일을 하는 지게꾼들은 비가 올 때는 건물 처마 밑에 앉아 비를 피하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담배를 피우거나,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는 일거리가 많은 시장통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게꾼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앞일을 걱정해야 했다.
수심 많은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 미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밝다. 항상 즐거워 웃고 있는 아이들은 작가에게 미래의 희망이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놀이기구나 장난감이 없어도 아이들은 마냥 행복해 한다. 골목 빙판에서 신발만 신고 미끄러져 내려와도 좋고, 팽이를 치거나 권투를 해도 좋다. 갑자기 대문을 밀어젖혀 누나가 아파 우는데도 동생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없다. 이 순박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전쟁의 상처는 하루빨리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산 국제시장 부근, 1953


4
광고사진가로 일평생을 걸어온 사진가에게서 기록의 범주에 속하는 사진만을 추출하여 거론하는 것은 그의 사진의 정수를 비껴가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본격적인 광고사진가로 선회하기 전까지 이 사진들은 그의 사진세계의 전부였다. 사실 한국사진의 역사 속에서 본격적인 기록의 언어가 등장하는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이전까지의 한국사진은 편향성을 갖고 있었다. 초기의 초상사진 시대에서부터 1930-40년대의 예술사진에 이르기까지 기록의 언어는 신문사진의 형태나 산발적으로 펼쳐지는 개인적 관심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사진의 예술성과 씨름하던 사진가들은 사진의 예술적 형식을 탐색해 나가는 동안 기록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해방 이후, 혹은 6·25전쟁 이후 등장하는 리얼리즘 형식의 사진은 그 시대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록의 언어에 속하지만 그 중의 상당수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형식미를 추구하는 공모전 형태의 예술사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리얼리즘을 표방한 1950년대의 사진이 한동안 상당수의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시대의 조류처럼 정착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차분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우아하고 균형잡힌 구도 속에 프레임을 재구성해내려는 태도로 대상에 접근했다. 공모전 입상만이 곧 사진가로서의 등용문이던 시대에 기록의 언어는 설자리가 없었고, 기록 작업을 했던 사진가들은 인쇄 매체를 제외하면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1950-60년대를 기록한 김한용의 사진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 가치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진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밀도 있게 스며 있는 그 시대의 사진 기록이 매우 적었다는 점에서 일관된 관점하에 촬영된 이 사진들은 그와 동시대의 사진가들이 격변기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역사의 격변기란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어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그만큼 쉽게 잊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격변기이고, 손쉬운 망각으로부터 그 시대를 보존하기 위한 기록의 중요성도 커진다. 중요한 격변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망각은 느리게나마 진행되는 까닭에 미래를 준비하는 민족은 역사의 보존에 아낌없이 현재를 희생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서양의 경우 본격적인 기록이란 대개 국가 주도로 시행됐던 것이 보편적이다. 사진이 발명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은 1841년에 프랑스 정부는 전국 각지의 문화유적을 기록하기 위해 대규모 사진반을 조직했고, 1930년대의 미국 정부는 도시 기록과 농촌 기록을 위해 각각 HABS(Historic American Buildings Survey)와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를 조직하여 수만 점에 달하는 사진 기록을 남겼다. 우리의 경우 이처럼 체계적인 대단위의 기록이 없었던 탓에 사진가 개개인의 개별적인 사진 기록은 질이나 시각의 다양성과 상관없이 모두 소중할 수밖에 없다.
1960년대 중반에 서울시의 의뢰를 받아 촬영한 그의 항공사진은 그런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사례가 된다. 이미 1930년대에 문치장이 동아일보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항공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김한용의 서울시가 사진은 기획의 방대함이나 질에서 볼 때 후대에 물려줄 만한 소중한 시각자료이다. 서울 전역을 구획별로 나누어 꼼꼼하게 촬영한 이 사진들은 각 지역의 지형지물과 주요 건물들의 배치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상세한 부감도이자 그 시대의 도시환경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는 역사자료이기도 하다. 진정한 역사자료란 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겨져 있는 자료들이라고 어느 역사가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다음 세대에 가치 있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향수일지도 모르고, 되풀이 살고 싶지 않은 시대일지도 모르지만 다음 세대에게 이 사진들은 현재보다 더욱 값진 의미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 사진들의 진정한 가치가 거기에 있다.



부산 동래, 1953
Tag : 김한용, 한국사진의 역사

name    password    homepage
 hidden


1954 Korea - 대구(펌글)

출처 블로그 > Survival in the Texas
원본 http://blog.naver.com/texasatm/150014112537

---이하 펌글입니다.



여행 이야기 도중 좀 생둥맞은 소재의 블로그 하나....^^;


1주일 전에 와이프가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미국교회의 Adam이란 할아버지 선생님의 저녁초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인들만 초대하는 저녁식사 였습니다. 전에 한국에 가본적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방문을 했었습니다.

처음엔 Adam의 나이 79세, 우리나라로 따지면 80 이었다는것에 잠시 놀랬습니다.

80세의 나이에도 volunteer로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한참이었던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서 2년간 교회의 봉사활동을 자원해서 한국에 왔었다고 하면서,

그당시 찍었던 귀한 한국의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대구를 들어가면서 찍은 대구의 표지판 입니다...

그당시에도 사과가 유명했군요....

백두산 가는길을 사랑하자라는 말이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대구는 15년전에 한번 가본적밖에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가 어딘지는 대구 사람도 잘 모를듯 합니다..^^;
소시장의 풍경입니다....

Adam에게 인상깊었던 한국의 모습은 모두가 검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거였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dam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중 하나인 한국 노인분들의 담배피는 사진 입니다.
이 사진은 Adam의 집 한견에 Letter지 크기로 벽에 걸려 있던 사진 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파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의 사진 입니다.

사진기를 들이댄 외국인에게 환한 미소를 건네주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한건 하신것 같으신 천을 파는 가게 아주머니의 모습입니다...

돈 다발과 아주머니의 보일듯 말듯한 미소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호물품인 옷가지를 받아가시는 아주머니와 등에 업힌 귀엽게 생긴 아이의 모습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장의 한켠....카메라를 의식한듯한 어색한 모습의 두여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수를 하는 들판의 모습입니다....

전쟁때문이었는지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어보이는 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수를 도와주고 있는 Adam의 젊은 시절 모습입니다.

Adam은 지게에 대하여 무거운 짐을 지어도 힘들지 않게 설계된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래 보이는 세 사진은 피난민촌의 사진 입니다.

바투 붙어있는 판자집들의 모습과 무쇠솥에 데우고 있는 분유를 기다리는 아이들,

피난민촌에 자주 일어났다던 화제의 모습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줄을서서 분유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Adam의 기억하나는 그당시 한국인들은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잘 모르고 진하게 분유를 주었다가 모두가 배탈이 나, 한동안 우유 배급은 거부했었다는 일화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공 화덕에서 분유를 더운물에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피난민촌에서 우유를 받아 마시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입니다.

사실 지금은 최소한 50대 중반 이상이 되었을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들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린 여자아이가 무거워 보이는 한푸대의 Charcoal(숯?)을 이고 가는 모습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재의 Adam과 아내 Alice의 모습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에 갔을당시 의대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자원 봉사를 나간 곳이라 합니다.

이후 몇나라를 더 돌아다니다가 UTMB(University of Texas Medical Branch)에서 의사 및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은퇴를 하고 교회에서 외국인들은 위한 영어수업등의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재에는 그동안 다녔던 30여개국이 넘는 나라들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된 기억들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서 몇장의 지금의 한국 사진과 영상을 보여 주었더니 한번 가보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서 이젠 여행하기 힘들거라며 웃어주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빛바랜 칼라사진들이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네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0여장이 넘는 한국전쟁 후의 대구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만,

 블로그 한페이지에 올릴수 있느 양이 한정되어 일단 몇장만 올려 봅니다...

올라와 있는 모든 사진은 Adam이 사용을 흔쾌히 허락 해 주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도깨비 뉴스에 기사화 되었네요.... 어쩐지 찾는이 뜸한 제 블로그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좀 놀랬다는....^^;
2007-02-07
 
http://www.dkbnews.com/bbs/zboard.php?id=headlinenews&no=76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구 매일 신문 (2007.2.9)에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online과 offline 동시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12일자 신문에 인터뷰내용과 사진이 더 기사화 될 예정 입니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402&yy=200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구 매일신문 2월 12일자 신문에 인터뷰기사와 대구 사진 120장 모두를 볼수 있습니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763&yy=2007


많은 대구분들이 사진에 대한 고증을 해 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램입니다.

그리고 지역발전에 힘쓰시는 매일신문도 많은 발전 있으시길 바랍니다.

Tag : 1954년대구사진, 한국사진의 역사

name    password    homepage
 hidden


BLOG main image
이것저것 끄적끄적 들락날락 거리며 주서모은 미술이야기
 Notice
댓글과 방명록 활성..
동영상 문제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32)
art-translation (35)
art-foto (14)
London life (12)
art+design (1)
art-publication (24)
Q&A (19)
moji-story (17)
Ideas (2)
good voices (3)
culture+ (5)
 TAGS
고급미술 인쇄 전통문화 팔레 드 도쿄 영국정원 바즐아트페어 이안매거진 포토넷 미야자키 기요시 가인갤러리 아르코전시 강수미 필름 2.0 문화복원 논제 작성 런던 스튜이오 언어철학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 이경민 포일이안 런던사진 자음암호 생계 대필논란 파리호텔 김영준 비엔날레 김한용 진중권 비디오설치 창작활동 소득 브라이튼 이형구 캠든아트센터 foil iann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모뉴멘트 최재균 포토넷1월호 베니스비엔날레 최봉림 상대주의 게으른 오후 남자친구의 대학별 반응 데지르 들롱 인도 아티스트 가나 갤러리 버지니아 총기난사 IANN 김윤호 트린T민하 반이정 탈루 매거진 P 1954년대구사진 사진아카이브 화랑해외진출 런던플랫청소 올리버 W. 홈스 Sr 한국역사사진 foil_iann 최정화 아라리오 서울 국가적 정체성 에르노트 믹 ‘푸른 대양 * 청춘의 개화’ 미니멀리즘 바네사 비크로프트 행위예술 조선시대기생 서양식 공간예절 이지누 바즐아트 서울시 복원 푼크튬 런던대학캠퍼스 게스투스 한국사진의 역사 국제다원예술축제 컬쳐뉴스 문화 예술인 도큐멘타 포일 이안 인터뷰 카셀 스프링웨이브 천경우 런던 탑 아트페어 비트겐슈타인 미술과 담론 아우구스트 잔더 사이먼 놀포크 한국사진역사 전시소개 포토런던 단락쓰기 사회적 초상 vol.3 Evil Monito 번역
 Calendar
«   2019/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Entries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영화(퍼온글)
이안(IANN)출간 2년 맞이 특별할인행사! IA.. (2)
필름 2.0 이안매거진 기사
예술사진 [이안] 매거진 2008년 가을/겨울..
잡지는 취향이다! 한겨래신문 (1)
Q&A: FOIL _ IANN for Evil Monito magazine
포일_이안 (FOIL_IANN) 인터뷰기사 @ 포토.. (2)
lost in translation
‘푸른 대양 * 청춘의 개화’ 에 대하여 (..
포일_이안이 대형/인터넷 서점에 출시!
 Recent Comments
source.....찾는거..
이미연 - 2009
벌거벗은 임금님동화..
montreal florist - 2009
한결같은 관심과 응..
mojikim - 2009
보일라랑 그라픽을..
+bueno - 2009
모가 빠르단? ㅎㅎ
mojikim - 2008
빠르다 빨러.........
백작가 - 2008
앞으로 보시고..더..
mojikim - 2007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종점 - 2007
축하하우!! 정말..
lullaby - 2007
12월달이면 대형서점..
mojikim - 2007
 Recent Trackbacks
database-empire.com..
database-empire.com
cheap databases eng..
cheap databases
buy databases lean
buy databases
buy databases contact
buy databases
buy databases tempe..
buy databases
database-empire.com..
database-empire.com
cheap databases eas..
cheap databases
database empire raise
database empire
database-empire.com..
database-empire.com
database-empire.com..
database-empire.com
 Archive
2009/10
2008/11
2008/08
2008/01
2007/12
 Link Site
이동우의 북세미나
 Visitor Statistics
Total : 185,982
Today : 2
Yesterday : 5
rss